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6 군사정변 (문단 편집) === [[붕괴 후 혼란기|급작스러운 민주주의 회복에 의한 사회 혼란]] === [[이승만 정부]]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장면 내각]] 10개월동안 가두데모는 총 2,000여건, 데모에 참가한 인원이 100만여 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으며,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을 부추긴 것은 당시 급격히 불어난 언론들이었다. 이승만 정부 붕괴 이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0,000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1961년 3월 초에는 「팔리 보고서」가 등장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비슷한 사태로 보고한 것이 바로 군사 쿠데타였다. 다만 당시 이러한 의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혼란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 판단한 주한대사의 보고서도 있는 등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는 상태였다.] >----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